임명장 등을 통해 본 선친의 일대기

서일교(徐壹敎, 19211984. 법학자·행정가)

법학자.행정가. 1회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뒤 국회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으로서 주로 형사관계법규의 정비에 힘썼다. 전형적 법제관료의 한 사람으로 법률실무, 특히 행정법규와 형사법규의 실무에 정통하였다.

대구 출신. 1945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1947년 제1회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다. 19521961년 국회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으로서 주로 형사관계 법규의 정비에 힘썼다.

19615·16으로 국회가 해산되자 서울고등검찰청 차장검사,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회 자문위원으로서 군정관계법률의 기초작업에 참여하였다. 19611963년의 군정기간 동안 법무부 형정국장 겸 대검찰청검사, 법무부차관 등을 거쳐 1963년말 민정이양과 함께 법제처장을 맡았다.

1950년대 초 한국전쟁 당시부터 자유당정권·민주당정권·군사정부 그리고 공화당정권에 이르기까지 숱한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국회법사위원회, 법무부,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회와 법제처 등에서 일관해서 일해 온 전형적 법제관료의 한 사람이다.

19691975년 총무처장관으로서 인사제도개혁에 나섰으며 건강이 좋지 않아 사임하고 2년간 변호사개업을 하였다. 1977년 다시 법원행정처장의 책임이 맡겨졌으며 1981년에는 대법원판사로 길을 바꾸었다.

그는 정부 안에 살아 있는 법률사전으로 통할 만큼 법률실무, 특히 행정법규와 형사법규의 실무에 정통하였다. 5·16 이전 국회 법사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있을 때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등에서 형법과 형사소송법 강의를 맡았다.

그는 1967년 정부와 여당으로부터 제7대 국회의원출마를 권유받았으나 사양하였다. 형사소송법·형법각론·조선왕조형사제도연구5권의 저서가 있다. 청조근정훈장·니제르훈장·엘살바도르일등훈장 등을 받았다.


이상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게재된 선친의 항목으로서 매우 딱딱한 이야기이나, 

이제부터는 공식적인 글에는 나오지 않는 집안 이야기를 졸업장, 임명장 등을 통해 적어본다.

1939.3.4. 경북공립중학교 졸업장

선친은 達城소학교 출신으로는 최초로 현재의 경북고등학교인 경북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선친의 중학교 동기로는 오탁근(법무부장관, 검찰총장)씨가 있으며, 후일 오탁근 장관의 여동생이 나의 외숙모(선친 입장에서는 처남댁)가 되리라고는 생각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외숙모의 동급생이던 박찬 변호사(검사, 국회의원)가 나의 고모부가 되었으니, 매우 복잡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89년 나의 약혼식에서 처외조부가 박찬 변호사를 만나 너무나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60년대 초 박찬 변호사는 대구지검 검사로, 처외조부는 대구남부경찰서장으로 같이 근무하였다고 한다. 거의 30년만의 재회이다.


1942.3.31. 경성제국대학 예과수료증서 및 1945.9.8. 동 법학사자격증서

당시 6년제 정규대학으로는 일본 본토에 東京, 東北(仙台), 京都(九州)6곳과 식민지 京城(朝鮮)滿洲(현재의 遼寧省 瀋陽)2곳 등 6곳에 불과하였다.

그 무렵 선친은 대구 북구 침산동에 사셨고, 제국대학에 입학하자 소를 잡아 잔치를 하였는데, 그 잔치에는 박작대기로 유명한 박중양도 참석하였다고 한다.

법학사자격증서에서 재미있는 것을 그 발급일자이다. 1945. 8. 15. 일본은 무조건항복을 하였으나, 같은 해 9. 초까지는 아직 미군에 의한 군정도 실시되지 않고 있고 계속해서 일본의 행정권이 계속 실시되는 과도기적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史料이다.

선친께서 자주 이야기하시던 대학동창으로는 이대원 화백(홍익대총장)과 김증한 교수님이 계신다. 이대원 총장님은 공부보다 그림이 좋은데 공부를 안하면 집에서 지원을 안해준다고 하여 할 없이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 그렇게 공부를 해서 제국대학에 들어갈 정도라면 어느 정도 천재인지 알 수 있겠다.

또 한 분은 선친께서 입에서 침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천재라고 칭찬을 하신 민법의 泰斗김증한 서울대 교수이시다. 특히 김 교수님과는 하숙방 룸메이트 관계로 더욱 특별한 관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김 교수님께서 교육부 차관 재직 시 지방출장을 갔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자신의 이름 석 자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선친은 눈물을 흘리면서 안타까워 하셨다.

한편 서울법대의 모 교수(민법)선친이 총무처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70년대 초 자신이 사법시험위원에서 자신이 배제되었던 이유가 선친에 대한 박사학위 수여를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선친에게 여쭤보니, “나는 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다. 민법에 대한 권위나 여러 모를 종합할 때 김증한 교수를 위원에서 배제하기 어렵지 않느냐, 그렇다고 해서 위원 3명 중 2명을 서울대에 위촉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대답이셨다.

1947.10.16.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증

         39년후 필자의 사법시험합격증과의 비교

변호사시험 합격

남조선‘, ’과도정부등의 명칭이 섬뜩하기는 하나, 미군정은 군정 실시 직후부터 민정 이양을 염두에 두고 안재홍을 민정장관을 임명하고 준비를 하여 왔다. 과도정부 사법부는 과도정부에서 법원과 법무부에 관한 사항을 총괄하던 기관으로서 1947년 첫 변호사시험을 실시하였다. 합격증서는 과도정부 사법부장 김병로, 즉 초대 대법원장이신 가인 김병로 선생이다.

광복 이후 과도기에는 법조자격을 취득하는 방법이 수십 종에 이를 정도로 혼란기였다고 한다. 심지어 1945.8.15.을 전후해서 치러지는 시험이 있었는데 주최(조선총독부)측 사정으로 시험을 전부 치를 수 없었으니 응시자 전원에게 법조자격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자격을 취득한 사람도 있고, 그 중에는 응시원서를 분실했다고 주장하면서 자격취득을 위해 평생 소송을 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혼란을 정비하고, 광복 후 최초로 실시된 정규시험이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가 주관한 조선변호사시험이다. 1947.10.16.의 합격증 수여식에서 가인 선생과 선친은 합격증 수여자와 피수여자라는 극히 무미건조한 관계로 만났을 것이나 그 후의 인연은 그렇지 않았다.


변호사 생활

선친은 조직에 얽매이는 것이 싫어, 1948년 대구에서 바로 변호사 개업하면서, 대구변호사협회의 초대 총무, 회장은 나의 첫째 고모부의 부친인 엄보익 변호사였다. 엄보익 변호사님은 변호사로도 유명하지만 서울의 조남철, 전라도의 전명환, 경상도의 엄보익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國手급 바둑고수였다.

이후 2년간의 변호사생활은 가시밭길이었다. 좌익사건 변론을 하다가 빨갱이로 몰려 사상검사로 유명한 검사에게 감시를 당하여 城西에 있는 선친의 외가로 피신을 하기도 하고, 집 뒷마당에 토굴을 파고 피신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집을 달성공원 앞의 인교동으로 이사를 한 상태였다. 이 집은 체신부장관을 역임한 신상철 장관의 부인(박씨)의 친정 집안의 사랑채였다고 한다. 6.25 피난 중에는 당시 고대학생회장이던 고모부(박찬 변호사)李鍾雨 고려대 총장님을 모시고 와서 피난생활을 하신 관계로 고려대 원로교수님 중에는 인교동 집을 모르시는 분이 없었다. 이 인교동 집은 할머니께서 살아계시던 1968년경까지 방학이 되면 놀러가던 기억이 난다.


부산 피난 생활

인민군이 점점 남하하면서, 대구 시내까지 박격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선친과 모친은 피난 결정을 내렸다. 일단 별다른 대책도 없이 부산으로 내려가 부산에서 은행원으로 있던 외삼촌(고태진, 조흥은행장, 축구협회 회장 역임)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우연히 부산 시내에서 선친을 만나 그 동안의 이야기를 들은 법조계의 선배인 엄상섭 의원은 누명을 벗는 방법은 공무원이 되는 길 밖에 없다고 하시면서 국회법사위원회의 전문위원으로 천거해주셨다.

선친이 취업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좁은 외삼촌의 집에서 나와 동대신동 시장 앞의 마산간장집 2층에 원세를 얻었다. 다다미 6장으로 방은 2, 부엌이 없었다. 임대기간은 2, 상하수도가 없어 매일 물을 들고 좁은 계단을 오르내렸고, 화장실도 없어 요강도 매일 계단을 통하여 해결해야만 하였다. 물론 난방시설도 없어, 뜨거운 물을 통에 넣어 난방을 하는 유탐보로 추운 겨울을 지내야만 했었다. 밥상도 없어 피난 때 갖고 갔던 트렁크 위에 남비와 밥상을 놓고 식사를 해야만 했다. 60년이 지나 나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시는 어머님의 눈시울은 아직도 그 때의 고생이 눈에 떠올라 붉어지시는 듯하다.


부산에서의 법사위 전문위원 생활

집밖의 일을 잘 말하지 않는 분이시라, 어머니께서는 당시 선친이 밖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상세한 기억은 없으나, ‘엄상섭 의원과 며칠씩 해운대 출장을 다녀오셨다는 기억은 있다고 회고하신다. ‘부산에서 해운대 출장?’이라고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 같으나, 당시는 전시(戰時) 중으로 치안이 불안해서 조용하게 작업할 곳을 찾기 어려웠고, 김정렴 전 청와대비서실장님의 회고록에도 해운대에 출장가서 화폐개혁 작업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현재는 법령이 상당히 잘 정비되어 있어 큰 입법이 많지 않으나, 당시는 기본법조차 정비되지 않은 상태라 국회의 입법활동이 매우 활발하였고, 따라서 법사위 전문위원도 그 만큼 업무량이 많았던 것 같다.

선친은 형법과 형사소송법 등 형사법을 담당하였는데, 주로 엄상섭 의원과 김병로 대법원장과 함께 작업을 하였다. 김병로 원장님과 함께 작업을 한 이유는, 가인 선생이 1948919일 출범한 오대(五大)법전편찬위원회의 위원장을 겸하셨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로 인하여 합격증을 받은 지 불과 5년 만에 가인 선생과 선친의 두 번째 인연이 시작되었다. 50년대 초반에는 맘보라는 춤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선친도 친구나 동료들과 맘보춤을 추러갈 계획을 잡아 놓았는데, 갑자기 가인 선생님 관사로 호출되어 밤새 법령 축조작업을 한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고 한다.

가인 선생과의 세 번째 인연은 나의 결혼이다. 1989년 결혼을 하고보니, 손위 동서가 가인 선생의 증손자였다. 합격증 수여로부터 50년만의 세 번째 인연인 셈이다.


1953.9.18. 상경(上京)

19537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우리 가족들도 1953918일 다른 국회 식구들과 함께 기차편으로 상경하였다. 머무를 곳도 결정하지 않고 무작정 상경하여 동료 전문위원이 소개하는 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당시 이삿짐은 사과궤짝 몇 개와 물을 담아두던 드럼통에 세간을 넣은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하룻밤을 묵어보니, 무엇보다도 상수도가 잘 나오는 것에 반한 어머니는 이 집을 구입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서울 성동구 신당동 290-91’을 매입하게 되었다. 대지는 109, 건평은 19.5(온돌 4.5조 및 온돌 3,8조 다다미, 마루)이었다. 매입대금은 총 3,000만환이었는데, 조부와 외조부가 각각 1,000만원을 지원해주시고, 나머지 1,000만원은 선친의 인세(印稅)로 충당하였다. 형법과 형사소송법 입법과정에 참여하였으니, 대한민국 최초로 이들 교과서를 집필할 수 있었고 그 인세가 유용하게 쓰인 것이다.

나는 1961년 이 집에서 태어나서 1990년대 중반까지 살았으니, 우리 집안의 고생은 하나도 겪지 않고 행복만을 누린 셈이니, 다른 가족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1961731일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제사법위원회 자문위원 위촉장

5.16. 이직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행사하는 국가의 최고 의사결정기구가 되었다.

동 회의는 20~32인의 최고위원으로 구성되며, 산하에 의장·부의장과 분과위원장으로 구성된 상임위원회와 각 소관 별로 7개의 분과위원회를 두었다.

위 위촉장은 7개 분과위의 하나인 법제사법분과위의 전문위원 위촉장이다.

1962319일 법무부차관 임명장

4.19. 이후 부정선거 관여에 따른 문책이 이루어지면서 검찰개혁의 일환으로 19606월 외부인사의 기용이 실시되었다. 선친은 서울고등검찰청 차장검사로 발령을 받았는데, 상세한 자료는 없으나, 그 시기가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선친은 1961623일 법무부 형정국장에서 법무부차관으로 승진하였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게재된 것과 같이 5.16 이후 고검차장이 되었다면 불과 5일만에 형정국장으로부터 법무차관으로의 인사이동이 형정국장으로 이동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4.19 이후 서울고검차장으로 기용되어 형정국장으로 이동하였다가, 5.16. 후 법무장관으로 승진이 맞는 표현이다.

임명내용은 행정이사관 겸 대검검사인 선친을 법무차관에 임명한다는 것이다. 현재는 대검검사는 차관급이나 당시에는 행정이사관급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사료라 할 것이다.

임명권자는 내각수반이다. 내각수반은 5.16 직후 행정부의 수장, 즉 현재의 국무총리에 해당다고 볼 수 있다. 초대 내각수반은 장도영이었고, 1963년 민정이양시까지 송요찬-박정희-김현철 등 4분의 내각수반이 등장한다. 위 임명장은 두 번째인 송요찬 장군이 수여한 것이다.


1963105일 인사위원회 자문위원회 위원장 임명장

선친은 법무차관 재직시 검찰총장과의 알력이 심했던 것 같다. 그 알력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상세하게 물어두지 않은 것이 아쉬우나, “법무차관은 장관과 총장 사이의 희생물이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인사자문위원회의 성격은 분명하지 않으나, 내각수반의 인사에 관한 자문기구가 아닌가 추정된다. 위 임명장의 임명권자는 마지막 내각수반인 김현철씨로 되어 있다.

고등고시 사법과 및 사법시험 위원 임명 및 위촉장

 제12회 고등고시 사법과시험위원 임명장은 연호(年號)와 임명권자가 단기(檀紀)와 국무총리이나, 13회 고등고시 사법과와 제1회 사법시험의 시험위원 임명장은 각각 서기(西紀)와 내각수반으로 되어 있다.

19631217일 법제처장 임명장

선친은 19631217일 민정이양과 함께 법제처장에 임명되어, 19691021일까지 710개월간 최장수 법제처장이 되었다.

필자가 주일대사관 법무협력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2005년 방일하신 유양수 동력자원부 장관님께 인사를 올렸더니 매우 반가워하시면서 자네 선친의 업적이 하나 둘이 아니나, 가장 큰 공적은 법령정비를 통해 우리나라 법질서의 토대를 닦은 것이라고 극찬을 해주셨다.

이는 선친의 노력뿐만 아니라, 박윤흔(법제처장, 환경부장관) 씨를 비롯하여 쟁쟁한 인물들이 법제관으로 포진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할 것이다.

한편 1988년 필자가 사법연수원 재직시 관련기관 파견형식으로 법제처에서 2주간 근무하면서, 당시 박윤흔 법제처자장님께 인사를 드렸더니, “서 처장님은 시도 때도 없이 박사무관(박윤흔 차장님 본인을 지칭)을 집으로 불러 업무지시를 하였고, 한 번은 단 한 벌밖에 없는 양복에 필자가 오줌을 싸서 고생을 한 적이 있다고 하시면서 파안대소 하셨다.

19691021일 총무처장관 임명장

선친은 항상 엘리트 관료가 공직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생각하셨다. 이에 따라 총무처장관 부임 직후 고시과(考試課)를 고시국(考試局)으로 승격시키고, 고시합격인원도 대폭 증원시켰다.

이에 대하여 근무연한만 차면 자동승격되기를 기다리는 그룹의 내부반발이 심하였으나, 엘리트 관료모델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선친은 사법부의 행정을 주관하는 법원행정처장으로 부임해서도 동일한 정책을 추진하여법원사무관 공채시험을 도입하였다.

197164일자 총무처장관 임명장도 있는데, 당시에는 내각 일괄 사표후 유임되는 경우에는 다시 동일한 내용의 임명장을 수여한 것으로 보인다.

선친은 간경화로 1972123일 내각일괄사퇴시 장관직을 사임하였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선친의 간경화는 과로에 기한 것으로 밖에 없을 것 같다. 몸을 좀 생각하면서 일을 하시지....라는 아쉬움 뿐이다.

민족문화대백과에는 1975년까지 총무처장관으로 재직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1973123일은 제1차 오일쇼크로 조기방학을 한 날이어서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날이다.

1977221일 법원행정처장 임명장

선친은32개월간의 처절한 투병 끝에 어느 정도 건강을 찾았다. 1975년에는 필자에게 유언까지 하였으나, 한약을 통해 기적적으로 재기에 성공하였다.

그 당시 입법부와 행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법원 행정의 선진화를 위해 법원의 인사와 회계를 관장하는 법원행정처장으로 발탁되었다.

선친은 당신께서 행정처장으로 부임해서 가장 먼저 한 것이 구내화장실에 휴지를 단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실제로 예산부족으로 법원 구내화장실에 휴지를 달 수 없었고, 화장실은 이용하는 판사님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만큼 두루말이 화장지를 뜯어가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사법시설특별회계예산이라는 것이 있었다. 벌금, 과태료와 같이 사법작용에서 발생하는 수입을 일반회계에 넣지 않고 특별회계에 넣어 경찰, 검찰, 법원의 시설 확충에만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당시의 분배비율은 경::=6:3:1이었으나, 이를 6:2:2로 바꾼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법원의 시설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후일담을 말하자면, 분배비율 변경으로 확보한 예산을 투입하여, 상징적인 의미로 신축한 건물이 법원 후생관(검은색 유리건물로 지금도 남아있다)이다. 판사님들의 복리후생을 위해 휴게실과 이발관 등을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부 판사님들이 아침부터 사무실이 아닌 휴게실로 출근하여 바둑 등 복리후생에 심취한 나머지 오전에는 폐관이라는 강경수를 야기하였다.

1979324일 헌법위원회 위원 임명장

유신헌법 당시의 헌법기관으로서 현재의 헌법재판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헌법재판 기능이 활성화되지 못하였고, 상임위원 1명과 나머지 위원은 전부 비상임위원이었다.

당시 법원행정처장은 당연직 헌법위원회 위원이었다.


1980312일 헌법개정심의위원회 위원위촉장

10.26. 이후 국회가 중심이 되어 헌법개정이 논의되었다. 당시 국회의 헌법개정 심의위원 중에는 각별한 친분이 있던 이경호 의원(법무부차관, 보사부장관 역임, 이영애 춘천법원장의 부친)이 있었다.

선친이 이경호 의원께 보낸 사신(19801~3월 작성)을 보면, 법관추천회의를 설치하고 이에 상당한 권한을 부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1981417일 대법원판사 임명장

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선친으로서는 마지막 공직인 대법원판사에 임명되었다. 그 직전 선친은 법원조직법 개정을 하면서법원행정처장을 대법원판사 중에서 1명을 임명하도록 하였다. 이를 두고 헌법재판관을 역임한 변 모씨는 선친이 대법관이 되고 싶어 법원조직법을 개정하였다고 비판한 글을 보았다.

그러나 실제 개정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법원행정에 관한 사항을 대법원판사회의에 보고하면 권위적인 대법원판사(대법관)들이 행정처장과 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토하는 사례가 않아 이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두 번째는 신군부에서 사법부의 인사와 예산을 관장하는 행정처를 장악하면 사법부 전체를 장악할 있고, 또 실제로 그런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한때 행정처장을 대법관이 아닌 판사 중에서 임명한 적이 있었는데, 불과 2~3년 만에 원상복귀한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선친은 설마 (아무리 힘이 세어도) 대법원판사까지 하겠다고는 못하겠지라는 말씀을 자주 하였고, 선친의 비서관이었던 분에 의하면연희동에서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속았다고 하면서 격노하였다고 한다.

남을 비판할 때에는 보다 정확한 근거에 기하여야 할 것이다.

훈장증

선친은 청조근정훈장과 니제르 훈장 및 엘살바도르 1등 훈장을 받았다. 훈장에는 국무총리와 총무처장관이 부서하게 되어 있는데, 선친의 청조근정훈장증에는 피수여자와 부서자가 동일하게 선친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기타 임명장 등


선친은 19848월 건강 이상으로 대법원판사직을 사임하였고, 198412월 별세하였다.

1921년에 태어나 1984년에 돌아가신 선친의 생애를 살펴보면 재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 6.25, 4.19, 5,16, 10.26 5.18 등 다른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단 한 번도 겪기 어려운 사건, 사태를 여러 차례나 직접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잿더미에서 오늘 날의 대한민국의 토대를 만드신 선친과 그 동년배들께 더 할 나위 없는 감사의 뜻을 표한다.

by basset98 | 2014/02/12 19:12 | basset 칼럼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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